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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 도전에서 퇴직까지 짤막한 여정

공무원에 도전하기

공무원에 도전하기 전, 나의 상태는

친애했던 동기 군무원 4명과 작별 인사를 하고 나는 다시 임용을 준비했던 원점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 어려운 시험을 뚫고 들어왔는데 나는 다시 시험을 준비해야 했다. 다시 개발자를 준비해 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준비했던 시험을 다시 준비하는 과정이 비교적 더 쉬울 것 같다고 생각했다.

공무원 도전 과정

합격의 기쁨 뒤,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다시 힘겹게 합격을 위해 달려야 했다. 연필을 그만 잡는 것이 꿈이었던 나는 언제 합격할지 모르는 여정을 다시 달려야 했다. 어쩌면 합격의 기쁨을 안겨 드렸던 부모님이 실망하셨을 텐데 과연 다시 그 기쁨을 안겨드릴 수 있을까? 원점으로 돌아오면 멀리 가기 위해서는 그만큼 더 빨리 열심히 뛰어야 하는데 잘할 수 있을까? 항상 불확실성의 연속이었다.

군무원 준비보다 힘들었던 것

마침 전산직 군무원은 마지막으로 “프로그래밍언어론”을 쳤을 때다. 그런데 공무원은 이미 4년 전부터 “프로그래밍언어론” 대신에 “정보보호론”으로 과목이 바뀌었는데 이 과목을 새롭게 공부해야 했다. 그런데 더욱 힘들었던 것은 “영어”였다. 공인 영어 시험 성적으로 대체가 가능했던 군무원과 달리 공무원 시험은 영어 과목이 있다. 공무원 시험에서는 영어 점수가 당락을 가르는 것을 넘어서 수험 기간을 좌우한다. 굉장히 부담이 되는 과목이었다. 하루에 8시간 이상 영어만 공부했던 적이 있을 정도로 부담이었다.
공부를 하면서도 군무원 동기들의 직장생활을 떠올려 봤다. 나와 달리, 동기들은 근무하면서 연차가 쌓이는데 나는 제자리로 돌아온 것이 마음에 걸렸다. 조급한 마음이 들 때면 항상 이 생각이 나를 힘들게 했다. 혼자서만 공부하기보다는 같은 상황에 놓인 사람들과 함께 공부한다면 위로가 되지 않을까 하여 시험이 임박했을 때 컴퓨터 일반과 정보보호론 과목은 오프라인 강좌를 수강했다. 함께 공부하는 수강생과 선생님과 대면하면 덜 힘들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노량진 수험 현장에 발을 들였더니 합격을 기원하며 하루 빨리 이 자리를 뜨길 소망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커피를 사러 카페에 들렀는데 합격 염원으로 찬 포스트잇이 가득했다.
5월의 장미가 꽃필 무렵, 힘든 마음의 시기도 지나가고 시험날이 다가왔다. 지방직 시험을 보기 위해서 시험장에 도착했다. 아버지가 바래다 주신 덕분에 시험장에는 수월하게 도착했지만, 너무 긴장했는지 속이 좋지 않았다. 시험 며칠 전에는 먹던 대로 먹으라는 인강 선생님의 조언에 식단 조절도 했건만 시험 직전에 배탈이 났다. 배탈은 처음 경험해봤다. 심지어 내 앞 사람은 다리를 흔들었다. 문제를 풀어야 하는데 마음은 조급하고 시야각 안으로 흔들거리는 다리가 눈에 자꾸 들어왔다. 시험에서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아서 손을 들고 감독관에게 글씨를 써서 “앞 사람 다리를 떨고 있어요”라고 적고 보여드렸다. 위기를 간신히 넘기며 시험을 봤지만, 망했다고 생각했다. 끝내 불시험이었다는 인강 선생님들의 오피셜에 이따금 위로했지만, 합격은 물건너 갔다고 생각했다.
바다를 좋아하는 건 이때부터였을까? 마음이 너무 힘든데 당장 여행을 갈 만한 형편이 되지 않아 부모님께 바다로 놀러가자고 졸랐다. 흔쾌히 바다로 가족여행을 가게 됐다. 결과에 대한 불확실성이 컸으나, 마음을 추스르며 다음 단계로 나아가려고 노력했다. 특히, 날이 더워질수록 공부는 체력적으로도 힘들었고 마음이 힘들어졌다. 이때 체력이 바닥나면 마음도 힘들어진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공부와 감정을 잠시 내려놓고,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해 바다를 바라보았다.
당연히 불합격이라고 생각하고 거의 한 달 동안 힘든 세월을 보냈다. 아니 그런데 웬걸…? 필기 시험에 합격했다고? 시험 망쳤다고 생각했는데? 지역에서 1명만 뽑는 시험이었는데 이게 됐다고? 왜? 납득할 수 없었다. 잘못 발표한 것은 아닌가도 의심했다. 이내 정신을 차리고 부랴부랴 면접을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구꿈사 카페에 들어가서 당장 면접 스터디를 할 인원들을 구했다. 수많은 인터넷 강의들도 유료/무료 상관없이 장바구니에 담아 수강 신청 버튼을 눌렀다. 이번이 아니면 다시는 합격이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간절히 준비했다. MBTI “I”가 분명한 사람인데 그 누구보다 “E”인 것처럼 면접 스터디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면접 당일, 스터디에 같이 참여했던 한 분이 마침 나보다 늦은 순번이셨다. 그래서 내가 면접을 어떻게 대답하고 있는지 들을 수 있었다. 그분은 내게 마지막 피드백을 주셨다. 이 피드백을 곱씹으면서 합격할 때까지 하늘에 맡기고 푹 쉬면서 최종 합격일만을 기다렸다.
그렇게 최종 합격만을 간절히 바라면서 기다린 나는, 1명을 뽑는 자리에서 최종 합격했다.
지방직에 합격하기 전까지는 합격할 수 있다는 걸 알 수 없으니까, 내가 응시할 수 있는 모든 시험을 준비하려고 했다.

공무원 생활하기

돌아보면, 공무원을 할 수 있는 기회도 생각보다 빠르게 찾아왔던 것 같다. 그래도 1시간 남짓 되는 거리였으나 연고지에서 가까운 지역으로 근무하는데다가 직장인들이 출근하는 ‘강남’을 피해갈 수 있어서 더욱 편했다(그래도 힘들어서 주말에는 곯아 떨어졌던 듯하다).

온보딩

군무원 임용 때는 신규 공직자교육이 굉장히 빨랐다. 하지만, 지방직 공무원은 그에 비해 온보딩 교육 시점이 너무 늦었다. 8월에 입사(수습)했는데 12월에 시 자체에서 1박 2일의 워크숍 형태로 교육을 진행했다.

경험했던 공무원의 일상

시내 소프트웨어 라이선스 관리하기
운영체제
OA 프로그램 관리
시내 PC 및 전산장비 수리 용역업체 관리
전산장비 수리 요청
수리 용역업체 계약
시내 전산 장비 관리하기
PC를 비롯한 주변기기
시내 전산장비 현황 관리
전산 장비 보안 업데이트 관리
보안 업데이트 및 보안 프로그램 관리를 위한 내부 교육 진행
운영체제 버전 관리 (7 → 10)
*사랑의 그린PC
내구 연한이 지난 공공기관 전산장비를 소외계층에 무료로 보급하는 사업
그 외
산불 대기
수해 복구 작업
눈 치우기

가장 기억나는 보람을 느꼈던 추억

군무원 때는 바이러스 서버 체계 설치라는 업무라도 진행했는데 지방직 공무원으로 근무할 때는 이보다 더 도전적인 업무를 수행하진 않았던 것 같다. 공무원 당시 업무를 떠올리자면, PC 내에 보안 설정이 제대로 세팅되어 있는지와 프로그램이 깔렸는지 설정하는 작업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시 전체 노트북을 내가 일일이 점검했어야 했는데 전원 케이블도 달라서 전원 케이블을 꽂고 전원을 켜고 점검하고 시스템을 종료하는 작업까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전원을 켜고 점검하는 과정만큼은 빠르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지 고민했다. 내 마음대로 소프트웨어를 설치할 수 없었던 이상, 내가 최대한 머리를 쥐어 짤 수 있는 영역은 ‘배치 파일’을 만드는 작업이었다. 배치 파일을 통해서 Windows 보안 설정을 할 수 있다면 시간이 빠르게 단축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마저도 제한적이긴 했지만, 그래도 번거로운 작업을 조금이나마 단축시킨다면 업무 효율이 올라가지 않을지를 고민했다.
반복되는 업무 중에서 전산 장비나 포인터와 같은 주변기기를 대여하는 일이 많았다. 대여자는 어떤 구성품이 들어 있는지 인지하기 쉽지 않은 상태여서 물건을 반납할 때 하나씩 빠뜨리고 제출하는 분들도 있었다. 주의사항을 간략하게 뽑아서 넣어 두면 물건 관리가 쉬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대여할 때는 장부를 작성했는데 그것만으로는 전산 장비가 어디로 가 있는지 확인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엑셀 시트로 관리하면서 현재 몇 대가 대여 중인지 한눈에 보여주는 대시보드를 만들었다(이때부터 프론트엔드 기질이 보였던 걸까). 크게 도전적인 일이 없어서 방황할 때는 조금이라도 일을 효율적으로 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공무원 그만두기

퇴직을 결심한 이유

조직 운영상 필요한 반복 업무를 꾸준히 수행했지만, 개인적으로는 더 도전적이고 창의적으로 에너지를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을 점차 지향하게 됐다. 그래서 오히려 이곳에서 더 많은 고민을 했던 것 같다. 잘할 수 있지만, 도전적인 업무라고 느낄 만한 부분이 없었다. 마찬가지로 이곳에서 30년 동안 행복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30년 동안 행복할 수 있는 곳일까? 아니었다. 군무원 때 고민했던 점을 나는 또 같은 문제로 고민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렇게 마침내, 다시 나는 원점으로 돌아가야 했다. 군무원으로 임용된 동기들은 벌써 8급으로 진급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나는 과연 언제쯤 사회적으로 안정적인 자리를 올라가 볼 수 있을까? 그간의 노력이 공허하게 느껴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외롭고 고민이 깊어졌지만, 내면의 방향성을 더욱 또렷이 정리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동네방네 “우리 아들 공무원 됐어”라고 자랑스러워 하시는 부모님을 또 다시 걱정에 휩싸이게 만들 수는 없으니까. 개발자로서 기쁜 소식을 전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또 다시 바다를 찾아 포항 호미곶 앞바다. 동 트기 전이 가장 어두웠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비로소 적성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개발자’가 된다면 공무원과 달리 도전적인 업무를 마음껏 수행할 수 있다고… 그 기념으로 기계식 키보드를 샀다. 친구네 집에 갔는데 이렇게 LED가 번쩍번쩍거리는 키보드를 한 번 써보고 싶었다. 하루종일 코딩해야 하니 손가락이 피로하지 않도록 나에게 작은 선물을 해 주고 싶었다.
공무원을 준비하기 전, “개발자”를 준비할까 고민했던 대학생 시절… 그때는 “개발을 취미로 즐기라”는 이야기를 많이 찾아 볼 수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내가 과연 개발자를 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을 내게 던졌다. 이전에도 던졌던 질문을 공무원을 그만두기 전에 던져 봤다. “공무원 시험에도 두 번씩 합격했는데 이정도 노력이라면 개발자 취업도 거뜬히 해낼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나는 개발자가 되었다. 그리고 교육자가 되었다.